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불어온 냉전체제의 갈등 속에서 한반도에는 새로운 두 국가가 탄생하였다. 한국전쟁은 두 국가가 이념적 대치하고 있던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북한은 7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경계선인 38도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한 전쟁이다. 북한의 침공행위는 냉전체제에서 발생한 첫 번째 군사행동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진행과정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국주의 시대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사라졌다. 당시 한국은 1910년 ~ 1945년까지부터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해방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무력통일 목적으로 남한을 남침한 것으로 시작되어 한반도 전체가 국제전의 전쟁터로 확대된 전쟁이다.
제국주의에서 냉전시대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새롭게 등장한 냉전이라는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와 소련을 중심의 공산주의가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었다. 한국은 위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에 합의했고 남한과 북한으로 민족이 나뉘는 역사적 비극을 맞이하였다. 분단으로 수립된 두 체제는 불안정했으며 서로가 스스로 유일한 정당성을 가진 통치체제라고 주장하며 이념갈등을 계속되었다. 결국 한반도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두 국가 사이의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남한 이승만의 대한민국
해방 당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 외교위 원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당시 미국은 남한이 정부를 수립할 능력이 없다고 분석하여 자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장관이었던 이승만의 귀국에 어려움이 있었다. 1945년 12월 이승만, 김구 등 많은 민족지도자의 신탁통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영국, 소련은 대한민국에 대한 신탁 통치안이 발표하였다. 1946년 6월 정읍에서 발표한 남한 단독정부라도 수립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연설은 큰 파장을 불러왔으며 이후 급변하는 냉전체제의 흐름에 맞춰 미국은 기존의 태도를 바꿔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거부 입장을 거두었다.
북한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한일합병에 의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 일어난 큰 변화는 민족주의라는 근대적인 사상이었다. 조선은 봉건적인 토지 모순으로 시달리는 농민들의 불만은 토지개혁, 사회개혁에 대한 요구를 불러왔다. 이런 사회경제적 조건은 공산주의 사상에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었다. 한국의 공산주의는 독립운동가들이 이주한 소련의 연해주 및 간도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북한은 일제강점기에 뿌리를 내린 공산주의 세력들이 연합하여 정권을 수립하였고 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 과정에서 김일성 중심의 체제가 성립되어 스스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선언하였다.
전쟁의 전개 상황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 5년 후,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고자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이렇게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자 UN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한국군의 계속된 후퇴 후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는 사이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국제연합군은 압록강까지 전진하였다. 그러나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1.4 후퇴)하고 38선 일대에서 공방을 벌이며 3년간의 전쟁은 최초 전쟁이 발발한 국경지역에서 교착상태를 유지한 끝에 휴전협상에 들어갔다. 이승만 정부는 민족분단을 우려하여 휴전에 반대하는 주장에 불구하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 휴전이 체결되었다. 한국전쟁은 휴전을 끝으로 1953년 7월에 끝났고 한국은 두 적대 국가로 분단되었다.
한미 방위 조약
한국전쟁의 휴전 후 한국은 미국에 북한의 재침을 우려하여 군사동맹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미국은 방위조약을 통해 한반도에 미군을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약은 대한민국에 대한 외부의 무력 위협 시 미국이 원조를 약속한 것으로 사실상 대한민국의 핵심전력을 이루는 것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결과
한국전쟁은 민족 간에 비극이었으며 한반도에서 치른 전쟁 중에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한 전쟁이었다. 약 300만 ~ 400만 명의 사망자 중 약 70% 이상이 민간인 피해였고 고아와 이산가족을 포함해 이재민만 약 1000만 명 이상이었다. 재산피해는 추산할 수 없을 정도로 전국이 초토화되어 국내 제조업 생산 시설의 40% 이상이 파괴되었다. 도로, 교량, 철도, 항만뿐만 아니라 개인 재산도 대부분 파괴되면서 한반도의 생활터전 전부가 황폐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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