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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

청산리대첩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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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10월, 중국 만주 간도 지역 청산리 일대에서 북로군정서군(김좌진 장군 지휘)대한독립군(홍범도 장군 지휘)등이 연합한 독립군이 무력으로 독립투사들을 응징하기 위해 출병한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 

청산리 대첩 진행과정

1919년 한반도 전역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중국 만주지역까지 영향을 끼침으로써 독립군의 투쟁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로 인한 일본의 독립군에 대한 탄압도 거세졌고 결국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후 중국 지린성 지역에서 마적 토벌하겠다는 명목으로 독립군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훈춘사건이 일본군에 의해 일어났다. 

독립군의 전투물자 확보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한 북로군정서는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기의 필요성이 절실했고, 1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자국의 독립으로 귀국을 서두르며 쓸모 없어진 무기들을 때마침 처분하고자 했다. 이렇게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두 집단의 무기거래를 통해서 독립군은 무력으로 항거할 수 있는 자원을 획득하게 되었다.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력 비교

일본군은 [간도 불령선인 초토 계획]에 빠라 배치된 19사단, 28여단, 관동군 부대를 동원하여 전투에 대한 만반의 태세를 갖춤으로써 중국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항한 독립군은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을 포함하여 약 1,600여 명이었고, 소총 1,300여 정, 권총 150여 정, 기관총 7문을 보유하고 있었고 홍범도 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의 병력은 약 1,400여 명이었다. 

독립군의 첩보활동

북로군정서 주력 부대는 1920년 8월경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군이 세 갈래로 장고봉, 도문강, 만철 수비대(만철:남만주철도 주식회사 약칭)는 송화강을 통해 북로군정서 군의 3면으로 포위하여 공격하려는 작전계획에 대한 정보를 획득함으로써 일본군을 간파하고 있었다. 북로 군정서 부대는 10월경 만주 길림성 청산리에 도착하고서 홍범도 장군의 부대와 간도로 출병하고 있는 일본군과 싸울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논의 끝에 전투를 반대하는 의견(피전론)으로 결정되어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전투를 자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부근까지 끊임없이 추격해오는 일본군을 따돌릴 수 없어 결국 과감히 전투를 결정하였다.

청산리전투의 전개 상황

청산리 계곡은 동서 방향으로 약 25km 펼쳐진 긴 계곡이다. 울창한 산림으로 갖추고 있었기에 이 협곡을 사람과 말이 통행이 곤란할 정도였다.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아래에 제1제대(비전투요원)와 제2제대(전투요원)는 청산리 백운평 상단의 고갯마루와 계곡 양쪽으로 매복함으로써 전투에 대비하였다. 드디어 일본군 추격대가 청산리의 협곡을 따라 이범석 장군의 부대가 매복한 지역으로 다다르자 독립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 추격대를 전멸시켰고 뒤따른 일본군 본대와 치열한 총격전이 펼쳐졌지만 이미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독립군에게 일본군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독립군의 맹공을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결국 도망치기 급급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도망치는 일본군을 일일이 추격하지 않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그 시각 인근 장소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남과 북으로 협공을 시도하는 일본군의 포위 작전 속에 홍범도 장군은 한때 위기에 빠졌으나 이를 재빨리 극복하였고 오히려 독립군이 빠진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 일부가 독립군과 전투복의 색상이 유사한 점에 놓여 이를 오인한 그들의 아군인 일본군과 독립군에게 둘러싸여 협공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주민들을 통해 일본군 기병 중대가 천수동 부근에서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획득하여 기병대를 전멸하였다. 이후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의 대반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하여 반격하는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일본군에 포위된 김좌진 장군의 부대를 돕기 위해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참가한 치열한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을 상대로 큰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추격해 오는 일본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수행하며 고동하 상류지역으로 이동해 주둔하였으나 일본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하지만 독립군은 어둠 속으로 신속히 대피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빼앗긴 진지를 역습함으로써 일본군에 많은 희생을 일으켜 퇴각시켰다. 퇴각한 일본군의 재역습에 대비하여 독립군은 안도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결과

청산리대첩은 일본군의 간도 출병한 이후 독립군이 일본군과 대결한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으며, 일본군과의 10여 회의 전투 끝에 최대의 전과를 거둔 위대한 승리였다. 이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고, 이에 반해 독립군은 100여 명의 희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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