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는 아시아 지역을 상대로 확장주의 정책을 펼친 미국 함대를 상대로 조선군이 강화도에서 싸운 전쟁이다. 북아메리카 동부지역에서 13개 주로 시작하여 '프로티어 정신'을 바탕으로 서부개척시대를 통해 반대편 태평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역사를 가진 미국을 상대로 예상 밖의 치열한 전투를 펼친 조선군의 항전으로 끝내 미국이 통상 요구를 포기하고 물러난 사건이다.
신미양요 전개 과정
1866년 개항을 요구하는 서양 강국들과 조선은 수차례 무력 충돌을 겪게 되었다. 미국은 조선에 대한 욕심을 갖고 중국과 일본을 이용하여 조선에 대한 개항을 시도하였으나 이를 완강하게 개항을 거부하는 조선의 쇄국정책 때문에 그 목적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조선의 문호 개방의 기회를 찾고 있던 미국에 빌미를 제공하였고 이를 계기로 미국은 강화도를 통해 조선 침략을 개시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 신미양요의 발달 사건
1866년 병인양요 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미국의 무역선이었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이르렀다. 대포와 총 등 현대식 무기로 무장을 한 제너럴셔먼호는 조선에 미국과 통상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법으로 다른 국가와 통상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흥선대원군은 미국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미국의 영해 침범을 경고하였다. 조선의 이러한 강력한 거부의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를 무시한 채 평양으로 진출을 감행하여 만경대까지 진출하기 이르렀다. 조선의 경고를 제너럴셔먼호가 무시하고 불법행위를 하였음에도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해야 한다."라는 「유원지의 원칙」에 따라 조선은 그들을 상대로 음식을 제공하는 등 도움을 베풀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너럴셔먼호 승조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의 관리들을 납치하여 가두고 이를 대가로 교역을 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민간인을 상대로 총을 쏴 죽이기까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의 이러한 만행에 분노한 평양 군민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이르러 결국 제너럴셔먼호를 향해 불을 질렀고 그 결과 제너럴셔먼호 안에 탑승하고 있던 미국 승무원 24명을 사망하게 한 사건이다.
전쟁의 전개 과정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더불어 조선과 통상 관계를 맺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아시아 함대(사령관 로저스) 소속 군함 5척과 1,200여 명의 군사를 조선으로 보냈다. 미국은 우선적으로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으나 이를 쉽사리 받아 드릴 조선이 아니었다. 조선의 통상 거절 의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조선의 허락 없이 뱃길을 조사한답시고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도 수로를 2척의 군함을 보내 마음대로 항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하던 손돌목 포대가 미국 함대를 향해 포격함으로써(일명 손돌목 포격사건) 미국과 조선 사이에 역사상 첫 군사적 충돌이 발발하였다. 결국 미국은 이 문제를 빌미 삼아 강화도에 대한 과감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초지진을 함포사격으로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까지 빠르게 함락하였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처참한 패배로 3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반면 미군은 10여 명의 사상자뿐이었다. 이 처참한 전투의 결과를 가져온 이유는 조선군의 열악한 전투물자를 바탕으로 미국의 선진화된 최신 무기에 맞서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을 상대로 결사적으로 진지를 사수하며 장렬히 전투에 임하는 조선군이 보여준 애국심과 용맹함을 갖춘 저항정신에 미국은 더 이상 힘으로 조선을 제압하거나 협상 타결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철수를 단행하였다.
조선 민중의 의지
최신 무기를 장착하여 압도적으로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침략을 개시한 프랑스, 미국 등 서양 강국의 연이은 공격을 연약한 조선이 방어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 무엇보다 외세 침략에 죽음으로 맞서 싸울 각오로 국가의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했던 선량한 민중의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향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등 미국과 갈등을 겪으면서 조선이 생각하는 서양에 대한 불편함은 신미양요로 인해 더욱더 커져갔고 흥선대원군에게 있어 미국의 철수는 그가 주장하는 외교정책의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쇄국정책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더불어 서울 종로, 강화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강한 의지를 새겼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서양 배척 풍조가 얼마나 강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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