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는 조선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을 가한 것을 발단이 되어 이를 문제 삼은 프랑스가 조선을 향하여 자국민의 피해 주장과 통상 수교를 요구하며 강화도를 통해 침범한 사건이다.
병인양요 전개과정
조선은 천주교 박해령이 발령된 이후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하여 한국인 남종삼과 정의배 등 한반도 내 천주교도 8천여 명을 학살하는 참극을 벌였다. 이 학살 과정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해 탈출한 프랑스인 리델 신부는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함대에 조선에서 벌어진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전달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정치, 외교, 통상에 있어서 조선의 이익과 자기 방위함에 있어 무엇이 우선이며 해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외국 문물이 조선으로 유입되는 것을 반대하는 쇄국정책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명 통상 거부 정책을 강력하게 펼쳤다. 19세기에 이르러 서양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펼쳐 아시아 즉, 조선까지 빠르게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런 서양 열강의 영향력에 놓인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은 대내적으로 왕권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국방력 강화와 엄격하게 서양문물의 유입을 차단함으로써 국난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이라 고집하였다.
러시아의 세력 확대
중국 아편전쟁 후 체결된 텐진 조약의 결과에 따라 러시아는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두만강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조선은 서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한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함경도까지 활동하면서 조선에 대한 욕심을 보였다. 조선은 러시아에게 있어 세계로 진출하기 위한 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통상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박해령 선포
위와 같은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의 욕망을 억제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천주교인들은 프랑스와 동맹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할 것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과 고종의 유모 또한 천주교 신자였던 만큼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갖추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 같은 천주교인의 제안을 수렴하여 프랑스와 맺기로 결심한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이를 제안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주교는 흥선대원군의 제안이 신앙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거절하였고 흥선대원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흥선대원군의 반대 정치세력들이 이 계획을 문제 삼아 공격하고 조대비까지 천주교를 비난하는 태도를 취하자 흥선대원군은 마음을 바꿔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고 박해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병인박해
병인박해는 1866년~1871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한국의 천주교 4대 박해 중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피해가 발생한 박해사건으로 기록된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박해령이 선포되어 프랑스인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 약 8천여 명이 지금의 서울 합정동 인근 용두봉에서 학살을 당하였다. 이러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 이유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를 통해 서양 열강 등 외세 침략으로부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서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취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프랑스 함대의 한반도 진출
리델 신부의 안내를 받은 프랑스 군대는 군함 3척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서울 인근 서강까지 도착한 프랑스 함대는 이미 수비진을 치고 있던 조선군을 확인하고 한강 주변을 측정하고 다시 중국으로 퇴각하였다. 다음 달 프랑스는 7척의 함대와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 강화도 지역을 점령하여 약탈함과 동시에 한강 뱃길을 봉쇄하였다.
조선의 대응
프랑스군의 침략 상황을 위태롭게 판단한 조선은 양화진, 문수산성, 정족산성을 이르는 방어진을 구축하여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조선은 프랑스를 자극한 원인이 된 천주교 학살사건에 관련하여 천주교 관련자의 처단에 대해 합법성 주장하고 한반도에 불법점거를 감행한 프랑스를 상대로 즉각 퇴거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자국민 보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며 선교사들의 학살에 가담한 관계자들을 처벌할 것과 더불어 수교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프랑스의 철수
당시 조선군대는 최신신 무기로 무장된 프랑스군과 전력상 전면전으로 싸울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군이 프랑스군에 대항하기 위해 택한 전술은 매복 작전이었다. 프랑스는 강화도를 점령한 이후 문수산성 일대에서 정찰을 시도하던 중 매복을 하고 있던 조선군의 공격으로 약 20여 명이 사상당한 후 프랑스 군은 황해도 연안까지 진출하여 조선인을 상대로 민간인 구분 없이 무차별적인 공격과 만행을 저질렀다. 정족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군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의 매복 작전에 의해 프랑스군은 약 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는 반면에 조선군은 사상자 5명뿐이었다. 이 전투에서 참패를 겪은 프랑스군은 더 이상 조선과 다툴 의지를 잃어 철수 결정하였다.
병인양요 영향
프랑스는 강화도에서 약 1개월가량을 머물며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된 조선 왕실의 역사를 기록한 책과 금, 은, 보물, 등을 약탈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군이 철수 하자 쇄국정책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굳혀 "프랑스의 침략은 천주교 때문이며 서양 오랑캐로 인해 더러워진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의 피로 씻어라!" 라며 [선참후계]의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더욱 심화되었다. 프랑스군이 약탈한 조선의 서적과 문화재는 유럽인들에게 한국 등 동양 문화를 연구하는 자료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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