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전투는 645년 중국 당 태종이 이끈 대규모 군대의 안시성 공격에 대항하여 백성들이 힘을 합쳐 약 3개월가량 공방전을 펼쳐 싸운 끝에 고구려가 승리한 전투이다.
안시성 전투 전개과정
중국 당나라 태종은 세력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고구려에 눈독을 들이며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임금을 시해하고 권력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빌미로 이민족 군대(돌궐, 거란)와 연합하여 약 5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구려 상황
당시 고구려는 과거 중국 수나라와 벌인 전쟁으로 인해 이미 많이 지쳐있던 상태였다. 그 뒤를 이은 당나라와 갈등으로 인한 국력낭비를 최소화하고자 고구려 영류왕은 당나라와 친분을 쌓으려 노력하며 외교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주안점을 두었다. 당나라 고조가 왕이 된 이후 사신을 자주 파견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며 고구려 영류왕은 태자를 당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수나라와 전쟁 중 포로가 된 고구려인을 송환받을 정도로 두나라는 긍정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 2대 왕인 당태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태도가 적대적인 자세로 바뀌자 고구려는 혹시 모를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적인 차원에서 천리장성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당나라와 관계에 있어 온건파에 속한 귀족과 영류왕은 연개소문(강경파)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이 두려워 연개소문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자신에 대한 암살 계획을 사전에 파악한 연개소문이 앞서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그와 연관된 온건파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그 뒤 보장왕(28대)을 임금으로 추대하고 연개소문 자신은 고구려의 최고 벼슬인 대막리지에 올라 정권을 장악하였다.
당나라 상황
당 태종 이세민은 당나라 2대 황제이다. 역대 중국의 황제 중 최고의 성군이며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군주로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형제를 죽이고 부모를 배신할 정도의 큰 야심을 가진 인물이었고 황제에 즉위하자 주변국들을 하나씩 제압하며 세력을 넓혀 나갔다. 그중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당연히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전략
당나라는 위와 같은 이유로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고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으로 직접 공격하지 않고 국경선 부근 여러 개의 성들을 차례로 함락하며 진군하는 전략을 펼쳤다. 이는 과거 수나라와 고구려와 전쟁을 통해 교훈으로 얻은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고 결국 당나라는 신성, 안시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들을 함락하였다.
주필산 전투
고구려 침략을 감행한 당태종은 요동지역의 고구려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수도인 평양성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해 그 길목인 안시성 인근 주필산까지 집결하였다. 고구려는 고연수(북부 욕살), 고혜진(남부 욕살)이 이끄는 15만 명의 대군을 안시성에 지원하였다. 당시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고정의는 고연수에게 정면 공격을 회피하고 당나라 군대의 보급을 방해하기 위한 기습작전과 지구전을 펼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고연수는 고정의의 의견을 무시하고 진군을 감행하더니 당나라 기병 1천 명의 유인책과 당 태종의 거짓 철수 사신에 속아 결국 당나라군에 포위 당해 퇴로까지 차단되어 고연수와 고혜진은 3만 6천여 명의 군사들과 투항하였다.
안시성 전투
당나라 군대에 있어 안시성 점령은 보급로 확보와 요동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로서 평양성으로 바로 공격을 하거나 보급로를 따라 안정적인 공략을 펼칠 수 있는 중요 방어선이었다. 당나라군은 위력적인 무기를 총동원하여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확고한 고구려군의 방어태세를 쉽게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당나라군은 다양한 전략을 시도하며 안시성 공격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계속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안시성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 이를 활용한 공격을 계획하고 60일에 걸쳐 50만 명을 동원해 작전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토산의 일부가 붕괴되면서 안시성 성벽의 귀퉁이가 무너지자 오히려 고구려군이 무너진 성벽을 통해 밖으로 나와 당나라군이 공들여 쌓은 토산을 점령하였다. 이후 토성을 재탈환하고자 펼친 당나라군의 극렬한 공격은 실패하고 추운 날씨와 보급품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퇴각하였다.
결과
우리에게 안시성 전투가 주는 의미는 당나라와 군사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과정에서 전쟁에서 장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그 과정에서 발생한 국력 손실로 인해 회복이 어려워 지자 다시 침공을 개시한 나당연합군에 의한 멸망의 기로에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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