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진주성 전투는 2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주대첩은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의미한다.
진주대첩 전개과정
임진왜란 당시 진주는 경상도 지역을 관리 감독할 정도의 큰 마을이었다. 임진왜란 전쟁 초기에 왜군은 부산포에서부터 한양까지 진격하는데 그닷 어려움 없이 공격하는 듯하였으나 진주성 등 후방지역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였던 진주성을 효과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하였다.
지리적 요충지
진주성의 시작은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최초 진주성의 모습은 흙을 사용하여 성을 구축하였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왜구의 잦은 침범을 대비하고자 돌을 사용해 고쳐 쌓아 성을 견고히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진주성의 외성 등을 확장하였다. 왜군은 평양까지 무서운 속도로 진격에 성공하였지만 조선-명나라 등 두 나라가 연합한 반격에 버티지 못하고 후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지연됨에 따라 왜군은 원활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군량미 부족 등 문제에 놓여 전투를 수행할 능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왜군이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지역이 호남지역의 곡창지대이다. 작전지역을 변경함으로써 이를 통해 우선적으로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하고자 하는 계산이었다. 왜군이 호남지역으로 접근하는 방법에는 해상과 육로를 이용하는 2가지 방안이 있었는데 해상은 이순신 장군이 이미 길목을 지키고 서 있어 바닷길을 통해서 호남지역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왜군에게 있어 엄두를 낼 수 없는 큰 장애물이었다. 전라도, 경상도 사이에는 지리산을 포함한 소백산맥이 흐르고 있어 험준한 지형이기 때문에 왜군에게 있어서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고 있는 진주성은 반드시 점령해야만 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제1차 진주성 전투 : 진주대첩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라고 일컫는 진주대첩은 제1차 진주성 전투이다. 1592년 10월 왜군은 김해를 통해 출발하여 창원을 거쳐 진주성에 도착하였다. 남강과 주변 지형이 어우러져 구축된 진주성은 공략하기 어려운 요새와 같았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진주성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 왜군을 공격에 효율적으로 방어하였다.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의 철두철미한 작전과 관련된 일화로 진주성 전투 직전 우병사 유숭인이 왜군에게 패한 후 퇴각하여 진주성에 들어가 함께 방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시민은 상급자인 유숭인이 진주성에 입성하여 함께 전투에 싸울 경우 작전계통에 혼선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그간 훈련해 온 작전에 차질이 생길 것을 예상하여 유숭인이 이끈 병사들의 진주성 입성을 거부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진주목사 김시민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더불어 외곽지역에서 맹활약했던 의병들의 죽을힘을 다해 싸운 노력이(곽재우, 정유경 등)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진주성의 안과 밖에서 이어진 협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경상도, 호남지역을 방어할 수 있었다. 진주성을 지킨 3,800여 명의 조선군은 10배에 가까운 왜군을 상대로 수적 열세를 극복하며 물러섬 없이 싸운 결과 왜군은 1만여 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이는 임진왜란 중 왜군이 겪어 본 적이 없던 피해로 그 기세가 꺾이기 충분하였다. 왜군의 호남지역 점령을 통해 보급을 확보하고자 했던 작전은 결국 대패하여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승리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된 중요한 전투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철수한 왜군은 1593년 6월, 그전에 비해 5배 이상의 병력을 이끌어 김시민의 목을 베기 위한 보복전을 감행하였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제1차 진주성 전투의 목적이었던 호남지역 진출보다 진주성 자체를 공략하여 복수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완패해 복수의 칼날을 갈던 왜군은 10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였고 방어하던 조선군은 수적인 열세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왜군 장수를 끌어안고 강에 뛰어들어 목숨을 바친 '논개 이야기'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
진주대첩의 결과와 의미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친 전투임에 비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대중적인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 다른 두 대첩의 장수들은 임진왜란 기간 중 계속된 활약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려진 반면 진주대첩의 승리를 이끈 김시민은 전투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진주대첩의 승리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단연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육로 공격에 대한 본영 방어에 신경 쓰지 않고 해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의병들의 폭넓은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장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진주성 전투 승리가 미친 영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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