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전쟁은 1894년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 교도들이 부패한 구한말 시대에 반봉건과 반외세를 외치며 피지배계층으로부터 일어난 개혁운동이다.
동학농민전쟁 전개 과정
대한제국 성립한 1897년부터 일제에 국권이 피탈된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까지 시대를 이르는 구한말 조선 사회 모습은 매관매직으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백성들의 삶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고 더불어 외세의 제국주의 강국들의 끊임없는 침입 시도로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과정에서 동학은 힘든 삶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민중들의 마음을 얻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동학
동학은 몰락한 양반 출신의 최제우(제1대 교주)에 의해 창시한 민족종교이다. 서양 종교(천주교)에 대항하여 동쪽나라인 조선의 도를 일으킨다. 는 의미에서 동학이라 이름을 붙였다. 유교, 불교, 도교등 삼교를 흡수한 동학은 최제우(1대 교주)의 시천주 사상, 최시형(2대 교주)의 사인여천 사상을 거쳐 손병희(3대 교주)의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 즉, 모든 사람의 평등함과 반봉건, 반외세 사상을 주장하였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동학이 탄압받은 이유
조선 정부는 동학을 금지시키고 교주 최제우의 처형과 함께 한반도에서 동학 교도들을 탄압하였다. 조선시대는 신분제와 조상숭배를 중시하던 시대로 이와 동떨어진 개념인 동학이 인내천 사상 내세워 백성들의 마음을 홀리는 행위는 중죄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교조 신원 운동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은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조 신원 운동의 주요 내용은 창시자인 최제우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풀어줄 것과 동학에 대한 탄압을 멈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의 동학 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고 1892년 공주 집회로 시작하여 1893년 삼남 집회 해산까지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며 시작하였지만 반공건, 반외세를 외치며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교조 신원 운동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사전 단계로서 그 의미를 가진다.
1차 동학 농민 전쟁
고부 민란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촉발하는 발단이 된 사건이다. 전라북도 고부에서 일어난 이 민란은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원인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저수지(만석보)를 만든다며 무리하게 농민들을 동원시킨 것도 모자라 처음 약속과 달리 저수지 물에 대한 사용료를 비롯하여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여 백성들의 분노를 키웠다. 또한 자신의 모신상에 부조금 명목으로 백성들을 상대로 강제로 2,000냥을 모을 것을 요구하자 결국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해 마을 대표인 전창혁(전봉준 장군의 아버지)이 조병갑을 찾아가 항의하는 과정에서 되려 곤장을 맞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결국 동학 접주였던 전봉준 장군은 분노가 하늘을 찌른 백성들이 규합하여 고부 민란을 일으켜 약 1천여 명의 백성들이 관아를 점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수탈당한 물건들을 백성에게 되돌려 주고 문제가 된 만석보 저수지도 무너뜨렸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민란에 겁을 먹고 도주 후 그의 악행이 밝혀져 파면과 함께 유배되어 합당한 벌을 받는 듯하였다. 하지만 솜방망이 처벌 이후 고등 재판관으로 복귀하여 동학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판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조병갑의 뒤를 이은 안핵사 이용태는 더욱 가혹하게 농민들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자 1894년 전봉준이 주축이 된 농민군의 봉기가 시작되어 고부를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에서 관군과 전투를 이어가 황토현, 황룡촌 전투에 이어 전주성까지 점령하기 이른다. 전주성 함락 소식에 놀란 조선 정부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수락한 청나라는 텐진 조약을 근거로 일본에 통보하여 일본과 함께 조선으로 상륙하였다. 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어 집강소와 교정청을 설치하기로 하고 물러나 민란이 해결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경복궁을 점령과 청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2차 동학 농민 전쟁
일본군의 경복궁 왕실 점령, 청일전쟁에 이은 갑오개혁으로 전봉준(남접)과 손병희(북접)가 합세한 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여 공주 우금치로 향하였다. 농민군 4만여 명은 관군 3천여 명, 일본군 1천 여명을 상대로 우금치에서 약 20여 일간의 격전에서 농민군은 10배에 가까운 수적 우세에도 최신식 무기로 싸우는 관군과 일본군에 처참하게 패하여 지도부 전봉준 등이 체포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동학 농민 운동이 의의
구한말 조선에서 일어난 개혁, 혁명은 지배층 중심의 시도로 위로부터 시행된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하위층이 겪고 있던 염원을 담지 못한 아쉬움의 문제점이 있었다. 그와 달리 동학농민운동은 피지배층인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역사 최초로 아래부터 시작된 개혁운동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비록 실패로 끝이 났지만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은 이후에도 역사에 반영되어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 의병활동, 무장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민족 운동인 3.1 운동에 까지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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