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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

살수대첩이 일어난 과정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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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이란 612년(영양왕 23년), '살수'라고 불리던 현재 청천강 일대에서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 장군이 뛰어난 유인 전술을 바탕으로 수나라 30만 대군을 상대로 싸워 고구려가 크게 이긴 전투이다.

 

살수대첩 전개과정 

통일제국을 수립한 수나라는 돌궐, 거란, 말갈까지 세력을 확장해 주변국에 대한 압력을 가하였고, 이로 인해 요서 방면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와 갈등을 유발하게 되었다. 끝내 요서지역 공격하는 고구려와 수륙 양로를 통한 수나라의 공격은 양국의 갈등 문제를 표면화되었다. 

고구려 상황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 후 국내성과 평양성 사이에는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장수왕은 왕권 강화를 통해서 이 문제가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막아 왔으나 장수왕이 사망하자 눌려왔던 이 귀족 간의 갈등 문제가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북으로는 돌궐과 연합하여 수나라에 대항하고, 남으로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항하였다.  

중국 수나라 상황

300여 년간 여러 나라로 나뉜 위진남북조시대를 수문제(선비족 출신의 양견)가 수나라로 통일하였다. 이 통일과정에서 돌궐 족을 흡수하지 못하였고 이 돌궐 족은 고구려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수나라는 결국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결정하였다. 

수문제-수양제 고구려 침공 과정

두 나라의 관계에서 선제공격을 결정한 것은 고구려였으며 당시 영양왕은 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수나라 요서지역을 공격함으로써 수문제를 자극하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이른 수문제는 30만 대군을 이끌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성급한 수문제의 공격은 유리한 전쟁을 이끌 계절적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채 장마로 인한 홍수와 태풍, 전염병과 군수물자의 보급이 막히면서 철수에 이른다. 수문제의 아들 수양제가 즉위한 후 수나라는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수양제는 황하와 양쯔강을 잇는 대운하 건설은 정치의 중심지 화북과, 풍부한 물자를 생산하는 강남을 연결함으로써 중앙집권을 강화시키는 주요 역할을 하게 되었다.운하를 기반으로 수나라의 경제의 발전을 이룬 수양제는 선왕인 수문제가 이루지 못한 고구려 침공을 계획한다. 우선 고구려와 연관이 있던 돌궐 족을 우선 제압하고 약 100만여 명에 이르는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향했다. 100만여 명의 군사 숫자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역사상 최대 병력에 이른다. 

고구려 '청야 전술'

수나라는 당시 물자가 풍부하고 지리적으로 중심에 위치한 요동성을 우선적으로 포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수나라는 이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겪게 되었다. 바로 고구려의 청야 전술(성 주변에 식량을 남기지 않음)이었다.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웬만한 성 주변에 도달하면 인근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었는데 요동성 주변에서 전혀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고구려가 농작물을 모두 불태우고 우물까지 메워버린 채로 요동 성안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축조 기술의 발달

고구려의 축조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 요동성은 돌과 흙의 2중 구조의 성벽을 쌓았는데 우선 돌을 쌓은 벽 뒤에 흙을 채워 성벽의 견고함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렇기에 수나라의 공격에 쉽사리 무너질 요동성이 아니었다.

고구려인의 강인한 정신력

수나라의 100만 대군에게 성이 포위된 채로 부족한 식량 사정과 전쟁에 대한 공포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인들이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기 있었기에 수나라를 상대로 수세에 몰리는 상황 속에서 약 5개월가량을 버티며 요동성 방어에 성공하였다. 

살수대첩

굳게 닫힌 요동성을 정복하지 못한 수양제는 초조함을 달래지 못한 채 전략을 바꿔 30만여 명의 별동대(정예부대)를 구성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진격할 것을 명하였다. 당시 평양성에서 수나라 맞이를 준비하고 있던 장수가 그 유명한 을지문덕 장군이었다. 이미 전투준비를 마친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별동대에게 끊임없는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는 게릴라 전술을 펼쳐 수나라의 전투력을 소진시켰다. 이러한 을지문덕 장군의 치고 빠지는 전략은 성공하였고 평양성 인근에 도착한 수나라 별동대는 이미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전투능력을 잃은 수나라 장수에게 을지문덕은 거짓말로 항복 편지를 보내는 전략을 세워 힘이 빠진 수나라 장수에게 퇴각의 구실을 제공하였다. 을지문덕 장군의 책략에 속아 방심한 수나라 별동대 장수는 기여코 철수를 선택하였고 30여만 명의 군사와 함께 살수(현재 청천강)를 건널 무렵 추격적을 펼친 을지문덕 장군에게 급습을 당하였고 수나라의 30만에 이르는 별동대는 '살수'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고작 2700여 명뿐이었다. 

수나라의 몰락

살수대첩 이후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에 대한 열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채 재차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무리한 고구려 침공으로 인해 백성들의 분노와 불만 등 내부 동요가 일어나자 결국 반란으로 건국 30년 만에 수나라는 멸망하고 이어서 당나라(618년)가 중국의 새로운 역사를 이었다. 또한 고구려도 수나라의 거듭되는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국력을 소모하게 되었고 훗날 고구려가 멸망에 이르는 중요 요인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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