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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

임진왜란이 일어난 과정과 주요 전투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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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고쿠 시대에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오랜 기간에 걸친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시키고 최고 지위를 얻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이후 일본 내 분열 양상 및 반대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 침략을 계획하여 침략한 사건이 임진왜란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상황과 달리 조선은 건국 후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며 자만심에 빠져 군사력 강화에 관심은커녕 붕당정치로 인한 당파싸움의 혼란 속에서 일본의 침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의 진행과정

조선 건국 후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여 이후 안정을 유지하여 왔으나 16세기에 접어들어 반복되는 사화와 붕당정치로 인한 대립 등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과 더불어 공신전과 별사전 등이 모두 세습되어 이어지면서 국가 재정에 어려움이 생겨났다. 이 와중에 공납 방납화가 생겨 농민에게 부담을 가중시켰고 양반관료에 의한 토지의 독점으로 농장이 확대되자 농민의 부담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조선은 국가의 재산을 늘리는데만 욕심을 갖고 군사력 강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이 건국되고 한 번도 큰 전쟁이 없었고 이웃한 명나라와는 사대관계, 일본에 대해서 해적 국가라고 얕보고 있었기에 군사력에 대해 조선은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노리며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일본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아무런 대비도 없이 왜군의 침략에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일본의 상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고쿠 시대에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오랜 기간에 걸친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시켜 최고 지위를 얻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이후 일본에 나타난 분열 양상과 자신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 침략을 계획을 주장하며 관심을 돌리고자 하였다. 정명향도 라는 명분을 주장하였으나 사실상 명나라가 아닌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도를 갖고 부산을 통해 침략을 개시하였다. 수륙 양면 작전을 벌이며 침공하는 일본은 한 달 만에 조선의 수도 한성을 진격하는 등 빠른 속도로 한반도를 함락해 나갔다. 당시 조선이 일본의 침략에 힘쓰지 못한 이유는 붕당정치에만 신경을 쓰고 국방력에 대한 무관심으로 군사력이 너무 미약했고 이와 달리 일본은 신흥 상업도시 발달에 힘입어 유럽 열강국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으며 특히 포르투갈로부터 수입한 신무기 조총을 빠르게 보급함으로써 엄청난 화력을 갖추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왜적을 크게 무찌른 3대 전투로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말한다.

한산도대첩

1592년 7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한 곳에 모아 일본 주력 수군의 총공격에 맞서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 전술을 펼쳐 크게 승리를 이룬 해전이다. 한산도대첩의 승리로 일본 수군의 주력을 격파되었고 이로 인해 육지와 양면 공격하겠다는 일본군이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 승리로 이제껏 연속된 패전으로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조선군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이전까지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한 상황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행주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달 만에 일본군은 강한 기세로 조선의 대부분 점령함으로써 패망을 앞둔 것처럼 보였으나 이순신의 수군과 의병들의 활약상은 일본군의 기세에 제동을 걸었다. 1593년 평양성에서 명나라 군사의 공격으로 철수하던 일본군은 조선군이 방어하고 있던 행주산성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고 권율 장군의 철저한 전투준비와 뛰어난 전략을 바탕으로 조선군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일본군을 상대로 용맹하게 맞서 싸워 큰 승리를 이룬 싸움이다. 

진주대첩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수군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죽은 일본군은 병력을 모아 경상도를 점령하려 했으나 진주성만큼은 공격을 해도 빼앗을 수 없었다. 2만 명의 군사로 진주성을 포위한 일본군에 맞서 진주목사 김시민과 3천8백 명의 군사와 백성들이 합심하여 효율적인 무기 사용으로 최신 무기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과 싸워 이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임진왜란 최초로 성을 방어함과 동시에 일본의 호남지역을 향한 진출 계획을 무너뜨린 중요한 전투였다.  

전쟁의 결과

노량해전을 끝으로 기나긴 7년간의 전쟁은 마침표를 찍는다.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나라 등 3국이 한반도에서 싸운 최초의 전쟁이자 최대 규모의 국제전으로 각 나라의 양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은 전쟁을 끝으로 조선 후기로 접어들었고,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서 얻은 도자 문화, 인쇄술의 발전을 이루려 노력하였으나 전쟁 기간 중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의 에도시대를 맞이하며 기존 개방정책에서 쇄국정책으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일본의 에도시대와 병자호란이 그 시기를 같이 하게 되면서 양국 간의 관계가 급속도로 호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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