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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난 과정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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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은 BC 492년 ~ 479년 사이에 일어난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로 원정을 떠나 싸운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BC 525년경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BC 513년부터는 발칸 반도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왕은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점령 후 다뉴브 강을 따라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트라키아 반도를 방어하던 아테네군의 밀티아데스(Miltiades) 사령관이 다리를 불태워 페르시아 군의 진격을 막아냈고 이는 페르시아 제국으로 하여금 트라키아 공격의 원인이 되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연합작전으로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대응하며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전개 과정

페르시아 제국은 3차에 걸친 그리스 원정은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모두 패배로 끝이 났다.

제1차 원정 :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에 대한 원정은 이오니아 지역의 문제로 시작되었다. 당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는 아시아 서쪽 끝에 있는 흑해, 에게해, 지중해에 둘러싸인 반도로 아시아와 유럽의 사이를 잇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며 소아시아 전역, 팔레스타인 전역,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리비아에 걸친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특히 아케메네스 왕은 육로와 해상로 개척에도 힘썼고 다리우스 왕은 홍해와 나일 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며 동서교역에 힘을 쓰고 있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오니아 지역은 페르시아 제국에게는 서쪽 국가들과 교역에 있어서 지리적으로 다리 역할을 하며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못지않게 많은 세금을 제공하는 중요지였다. BC 499년 ~ BC 493년 그리스의 정치인 아리스타고라스(Aristagoras)를 중심으로 한 소도시들의 연합으로 이오니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오니아 반란은 아이올리스, 도리스, 퀴프로스, 카리아의 반란이자 그리스 여러 지방들이 페르시아에 대한 대항이었으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BC 494년 이오니아 소도시들을 모두 점령했다. 다리우스 왕은 BC 492년 마르도니우스(다리우스 왕의 사위)를 선두에 세워 트라키아(그리스 북부지역) 원정을 시작하였다. 함대는 헬레스폰트 해협(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했으나 함대는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되어 300척의 전함과 20,000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한다. 이를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라고도 한다.

제2차 원정

BC 490년, 페르시아 제국은 제2 원정에 시작한다. 다리우스 왕의 형제 아르타페네스와 다티스장군은 아티카와 에르트리아가 이오니아 반란에 협조했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 실리시아군을 주력으로 한 30만 대군을 이끌어 아티카와 에페트리아를 공격하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를 함락시킨 후 아테네로 공격을 이어갔다. 아테네는 종교행사를 이유로 스파르타의 파병을 지체함에도 불구하고 1만 명 아테네군과 프라타이아 지원군 1천 명의 지원으로 페르시아 군에 맞섰고 아테네군의 중장병과 밀집 대전술을 앞세워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 군은 6,400명이 희생당하였으나 아테네군은 희생자는 192명으로 이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를 단념하였다.

제3차 원정

다리우스 왕은 다시 전면적인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하지만 BC 489년부터 바빌로니아, 이집트 지역의 반란이 지속되자 원정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다리우스 왕의 사망하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그 뒤를 이어 페르시아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물자를 모아 그리스 침공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유례없이 대규모로 인해 진군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고 그사이 그리스 군은 탄탄한 방어 태세를 구축하였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 군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30개 도시국가의 동맹으로 결성되어 지상군은 스파르타가, 해상은 아테네가 지휘하였다. 그리스 군은 테르모필레의 협로에서 7천 명의 병력, 그리고 아르테미시움에 271척의 전함을 배치하고 페르시아 군을 대비하였다. 페르시아 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작은 배들을 엮어 다리를 걸고, 아토스 곶에는 운하를 건설함으로써 지상과 바다를 이용한 양방향에서 그리스를 공격하였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테르모필레의 협로를 방어하고자 했으나 내통자로 인해 전원 사망하여 돌파당했다. 그러나 해전에서는 양측 모두 많은 피해를 입어 쉽사리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아테네는 대함대를 건조하여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충분히 대비하고자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함선에 승선할 것을 설득함으로써 아테네와 살라미스 섬 사이의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였다. BC 479년에는 크세르크세스의 대를 이은 마르도니오스는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하였고, 같은 해 그리스 함대가 소아시아의 미칼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다.

전쟁의 결과

세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이로 인해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나 그중에는 페르시아에 항복한 도시도 있었고 아테네 안에서는 페르시아와 내통자가 있기도 했었다. BC 480BC 479년 그리스 군의 총지휘권은 스파르타가 장악했고 그 후로는 아테네가 대신 연합함대의 지휘하였고 마침내 델로스 동맹을 주도함으로써 그리스의 패권을 쟁취하였다. 마라톤에서는 중간 시민의 활약과 살라미스에서는 가난한 노동층의 활약으로 정치적 발언력이 그들에게까지 미침으로서 아테네의 민주화를 촉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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