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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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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남·북부 간 내부적 정치노선 차이와 대외적인 냉전 대립의 영향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베트남 전쟁은 군사 대국 미국에 유일한 전쟁 패배를 안긴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의 전개 과정

대외적 냉전 대립과 내부적 정치 노선과 사상의 차이가 있었으나 이념 논쟁 이전에 베트남 남북 간의 지형적 문화적 격차가 심했다. 베트남 남부지역은 말레이계 참족의 인도 문화권(이슬람교와 힌두교)에 속하고, 베트남 북부지역은 킨 족의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유교  한자)에 속해 있어 서로 계통과 문화적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베트남 왕조의 수도로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던 북베트남의 하노이와 달리 남베트남의 사이공은 17세기 말 응우옌 씨가 메콩강 인근 델타 지역을 방어를 목적으로 세운 군사거점으로 도시의 기능으로써 역할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프랑스에 의해 인도차이나 식민지 경영 이후였기에 수도 지역의 상징성과 비교할 수 없었다.

강대국의 식민 통치

베트남은 1883년부터 프랑스에게 식민지배를 받아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프랑스는 일본에게 잠시 베트남을 식민지배를 뺏겼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의 식민지배는 끝이 났다. 베트남 북부에서는 1941년부터 베트남 독립 전선을 결성하였다. 그사이 호찌민이 앞장을 선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왕조는 붕괴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수립되었다.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부터 8년간 이어진 인도차이나 전쟁의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에게 뺏긴 베트남을 프랑스가 다시 식민지로 되찾고자 벌인 전쟁이다. 1945년 8월 2차 세계 대전 종료 후 호찌민은 하노이를 중심으로 독립선언과 함께 베트남에 남아 있는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고자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끝내 베트남 식민지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지 못해 결국 협상은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깨졌다. 호찌민의 프랑스에 대한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전쟁이 발발하여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호찌민의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을 섬멸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허무하게 식민지를 잃고만 프랑스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미국은 식민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프랑스의 지원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포기하지 않고 미국 아이젠아워 대통령의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 거론하며 미국 지원의 명분을 제시하여 설득함으로써 이 전쟁에서 베트남의 공산화 막고자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하였고, 호찌민이 이끈 베트남군은 중국, 소련 공산당의 지원받아 전쟁을 치르게 된다. 호찌민의 베트남군의 승리로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통치시대의 막을 내렸다. 그 후 제네바 회의에서 미국이 중심이 된 서양 강대국들은 베트남 사회주의화의 반대를 주장함으로써 결국 북베트남(월맹) 지역은 호찌민이 이끄는 독립국가로, 남베트남(월남) 지역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응오딘 지엠 대통령 정권으로 각각 나뉘어 수립되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연결고리 : 호찌민 루트

남베트남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에 1960년 12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일명 베트콩이 결성되었다. 호찌민은 베트콩에 대한 지원을 통해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게릴라 활동이 시작되었고 지엠 정권은 1958년 반공법을 통해 남베트남 내 노동당 조직에 대한 대대적으로 탄압을 시도하였다. 북베트남은 직접적인 공격 태세를 취하지 않고 베트콩을 지원하는 것에 주력을 다한 이유는 베트콩을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는 집단으로 만들어 방패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지형적 특징을 가졌는데 그중에도 중부 지역은 특히 좁아져 있어 지도상으로 보이는 지형상 분단선의 방어가 용이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 서쪽에 이웃한 라오스, 캄보디아는 자국 영토를 스스로 통제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상 북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통한 호찌민 루트를 만들어 베트콩을 지원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 응오딘 지엠 대통령의 부패 정권

베트남의 남북 분단으로 남베트남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응오딘 지엠 대통령을 중심으로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토지개혁을 통해서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로부터 다시 토지를 회수하는 것을 비롯해 응오딘 지엠 대통령의 더러운 욕심이 불러온 부패정치로 국내 지지도는 추락했고 제네바 협정에서 합의한 총선거를 거부한 독재정치 성향은 민중의 반발을 자극하였다. 이와 같이 응오딘 지엠 정권의 타락과 민중을 향한 대규모 학살에 맞서 지방 곳곳에서는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63년 정국의 혼란의 기회를 얻어 증엉반민이 일으킨 쿠데타로 지엠 정권은 결국 붕괴되었다. 1964년 응우옌 구엔 칸의 연이은 쿠데타로 남베트남 정권은 반복된 쿠데타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고 남베트남의 부패한 정권은 국민들의 신뢰를 잃는 등 내부적인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북베트남은 이 상황을 틈타 수많은 간첩들을 침투시켜 남베트남의 사회혼란을 부추겼다.

통킹만 사건

이런 불안정한 남베트남을 지원했던 미국은 북베트남의 베트콩 지원로였던 호찌민 트레일을 공격하였고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통해 미국 전함 두 척이 북베트남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사실 이 사건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1965년 2월부터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에 나서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미군의 베트남 주둔은 1961년부터는 대규모로 도입하게 되었고 1967년 11월까지 약 50만 명의 지상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미군은 밀림에 고의로 불을 지르고, 식물을 말라 죽이게 하는 고엽제를 사용하는 등 무자비하게 북베트남을 공격하였으나 전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오히려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전장 영역이 확대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결과

1968년 1월 31일 설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소속 게릴라들이 남베트남의 36개 도시에 대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되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 있던 미국의 주요 시설이 대규모 공격을 당하였고 게다가 미국 내 반전 여론이 거세지면서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베트남 전쟁의 군사적 개입 중단을 주장한 닉슨 대통령이 당선 이후 북베트남과 미국 사이에는 평화교섭이 이루어져 1969년부터 남베트남에서 미국이 단계적으로 철수하며 일시적으로 전쟁이 소강상태를 이뤘다. 하지만 1970년에 들어 다시 전쟁이 재개되는 듯하였으나 1970년대 미국은 경제난과 더불어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습하느라 휴전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고 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이 되자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개입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1972년 다시 평화교섭이 재개되고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담은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베트콩의 대표가 모여 전투를 중단하기로 하는 휴전협정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와 남베트남 민족 자유전선이 민족화해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한 휴전협정의 합의는 또 다른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왔다. 결국 1975년 4월 북베트남의 대규모 공세로 사이공이 함락되고 즈엉반민 대통령이 항복을 하며 베트남 전쟁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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