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 벌어졌던 전쟁으로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 결과 잉글랜드는 약소국으로 도태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가의 혈통까지 끊기고 말았다. 이 난관에 봉착한 중세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차지하기 위해 두 가문이 다툰 내전이 장미전쟁이다. 장미전쟁은 랭커스터가의 붉은 장미와 요크가의 흰 장미를 각각 문장으로 한 데서 명명한 것이다.
장미전쟁의 전개과정
잉글랜드 왕가의 혈통 단절의 문제로 왕위에 욕심을 가진 수많은 귀족 간의 갈등과 전쟁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수많은 여러 가문들 중에서 대표적인 가문이 백장미의 요크 가문과 흑장미의 랭커스터 가문이었다.
두 가문의 갈등의 시작
백년전쟁에서 패배할 당시 잉글랜드의 국왕은 랭커스터 가문 출신의 헨리 6세였고 전쟁의 패배로 가문의 권위가 추락하자 요크 가문이 반기를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헨리 6세는 출생 후 9개월 만에 왕위에 올라 중신과 왕비에 휘둘리고 있었다. 특히 요크가의 리처드 공작은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군 사령관으로 주둔하였는데 백년전쟁 패배의 원인을 자신의 승리를 질투하는 헨리 6세의 측근 탓으로 여겼기에 백년전쟁에서 살아남은 군사력을 이끌어 궁전을 점령하고 헨리 6세를 대신하여 자신이 섭정을 맡았다. 그 결과 헨리 6세의 왕비 마가렛을 포함한 랭커스터 가문 세력은 웨일스로 우선 피신하여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얻어 훗날을 위해 세력을 다지고자 했다.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 리처드 3세
이에 요크 공작은 랭커스터 가문에 대한 불안한 요소를 애당초 없애고자 토벌에 나섰지만 실패했고 이후 요크 공작의 아들이 성장하여 랭커스터 가문의 세력을 흡수하고 헨리 6세와 마가렛 왕비를 몰아내는 것에 성공하여 에드워드 4세로 새로이 왕위에 등극하였다. 에드워드 4세의 사망 이후 에드워드 5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12세의 어린 나이에 불과하여 삼촌인 리처드(에드워드 4세의 막내 동생)가 그를 대신하여 통치하였으나 결국 왕위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리처드에 의해 에드워드 5세를 뒤따르던 세력을 없애 억지로 왕위를 빼앗으며 리처드 3세로 등극하였다. 리처드 3세의 무자비한 왕위 찬탈 행위는 요크 가문 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왔고 잔존 요크 가문은 랭커스 가문의 헨리 튜더와 연합을 통해 반란을 도모했다.
랭커스터가 헨리 7세의 튜더 왕조시대
리처드의 실정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던 차에 헨리 튜더가 중심이 된 반란군은 리처드 3세의 진압군과 결전을 치르고 도망하던 리처드 3세는 말에서 떨어져 전사하였다. 헨리 튜더는 땅에 떨어진 리처드 3세의 왕관을 자신의 머리에 올려 왕좌를 획득한다. 헨리 튜더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왕위에 올라 헨리 7세가 되었고 두 가문의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합쳐 왕가의 상징으로 삼았고 영국 튜더 왕조시대가 열렸고 이는 곧 대영제국으로 이어진다.
전쟁의 결과
영국 튜더 왕조의 심벌은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합작품이다. 장미전쟁의 오랜 기간 동안 몸소 체험한 것은 상대를 포로로 잡았다가 풀어주게 되면 후에 반란세력이 일으켜 적이 되어 돌아와 보복을 한다라는 생각에서 모든 귀족 포로들을 죽여 버렸다. 결국 전쟁을 치르던 30년의 기간 동안 생존한 귀족은 과거에 비해 30%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 있었기에 영국에는 강력한 튜더 왕조가 이어지게 되었다. 튜더 왕조는 국가 운영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많은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밑바탕을 이루었고 프랑스와 달리 시민 대혁명과 같은 반란을 피해 갈 수 있는 기반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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