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 이야기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봅시다.

반응형

인천상륙작전은 냉전체제로 분단된 한반도에서 1950년 6월 25일 공산주의 북한의 민주주의 진영의 남한을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 낙동강 지역을 빼고 한반도 전지역을 점령 당한 상태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계획으로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기 위해 1950년 9월 15일 인천에서 펼친 상륙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전개과정

코드네임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불린 인천상륙작전은 파죽지세로 공격을 하는 북한군에게 경상도까지 밀려 오다가 인천을 통해 한반도의 허리 지역을 장악하데 성공함으로서 한국전쟁의 상황이 역전되었다.

인천상륙작전 배경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북한군은 경상도까지 강하게 밀어 붙혔으나 계속된 전투에 의한 피로, 장거리 보급문제, 연합군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으로 인해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상태를 이루게 되었다. 한국군과 연합군은 시각적으로 방어에 용이한 낙동강을 주요저지선으로 삼았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률 1/5000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에 앞서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이미 50여회 이상의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성과와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최초 상륙작전을 시도할 도시로 거론된 장소는 군산이었다. 군산은 상륙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으나 작전의 목적이었던 북한군의 보급선 차단, 북한군 병력의 포위를 실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맥아더 장군은 인천이 상륙작전의 최적지라고 주장하였고 북한군의 주보급로인 경부선 철도는 서울을 통과하기에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북한군의 지상 보급을 차단한다면 북한군 전체를 와해시킬 수 있을 것을 판단하였다. 하지만 참모들은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7~9m에 이르고 넓은 갯벌은 병력과 장비의 이동에 제한되고 방어시설을 잘 갖춘 항구등 상륙작전에 어려운 문제점을 들어 맥아더 장군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며 군산이나 평택으로 장소를 변경할 것을 주장하였다. 

상륙지 인천으로 결정

참모들이 주장한 인천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상륙지로 선정된 것은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 후방을 완전히 단절한다는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장소가 인천뿐이며 인천 연안에 배치된 북한군 방어병력의 수가 매우 적을 것으로 예상되고 상륙시 내륙까지 진입거리가 짧다는 것은 연합군에게 유리한 점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맥아더장군은 결국 인천상륙작전의 최종 승인을 받게 되었다. 

양동작전 교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적을 교란할 양동작전을 시행하였다. 양동작전이 이루어진 장소는 삼척, 군산, 영덕에서 시행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시행 2일전 인천, 군산, 삼척, 영덕과 함경도 마량도등 상륙작전이 가능할 만한 주요 해안에 대규모 폭격을 시행하였다. 이 교란 및 기만작전은 북한군의 관심을 다른 장소로 돌리기에 충분했고 상륙작전 방해요소를 사전에 파괴하였다. 

상륙작전의 결과

남한군과 유엔군의 병력을 합해 7만 명이상의 병력과 260여 척의 함정이 상륙작전에 동원되었고 유엔군은 500여 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에 북한군은 15,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