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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

제 2차 세계 대전 연합국의 유럽 탈환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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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1944년 6월 6일 ~ 6월 30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에서 시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코드네임 오버로드, D데이라고도 불린다. 노르망디 해안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는 약 1만 명 이상의 독일군을 상대로 미국, 영국이 주축이 된 8개국의 연합군은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유럽지역을 탈환에 시동을 거는 첫 단계였다.

상륙작전의 전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원된 연합군의 병력은 무려 약 15만 6천 명이었다. 이 상륙작전은 육해공군을 모두 포함하여 인류 역사상 최대의 작전으로 불리며 영국 프레데릭 모건 중장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진두지휘하였다. 지상군 사령관은 영국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가 맡았고 연합군의 북부 유럽 침공 작전을 위한 작전명은 넵튠(Neptune) 작전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었다. 

상륙작전의 2단계

상륙 작전은 2단계로 나누어 시행되었는데 첫 번째 단계인 공수작전은 6월 5일 ~ 6일 사이 자정쯤에 시작되었고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 공수 부대원 약 24,000여 명이 이 작전을 수행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아침 06:30분에 보병과 기갑부대로 구성된 상륙부대가 해안에 상륙하는 것으로 이 상륙작전이 시행되던 해상의 기상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장군은 상륙작전 감행하는 결단을 내렸다.

악천후 기상의 돌파

6월 4일 당시 노르망디 해안에는 거센 강풍과 높은 파도로 인해 상륙정을 운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악천후의 기상이었고 낮은 시계는 전방을 식별할 수 없어 공군 작전 수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행되던 날의 기상은 사실상 상륙작전이 불가함을 나타내 주고 있었기에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판단이라면 6월 5일 상륙작전을 통한 공격 계획은 전면 취소하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미 상륙 작전 계획에 따라 동원된 많은 병력과 군수물자들이 모두 바다 위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에서 또다시 기회를 미룬다면 차기 작전을 위한 환경을 확보하기 위한 다음 만월이 뜰 때까지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계속하여 대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만작전 보디가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기습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성공요인 중에는 악천후 기상과 더불어 독일군에게 혼선을 일으킨 연합군의 기만작전을 손꼽을 수 있다. 이 기만작전은 작전명 보디가드로 불리었는데 독일군의 경계심을 상륙 예상 지점인 노르망디가 아닌 다른 장소로 눈을 돌리는 것에 성공하였으며 기만전술을 통해서 이러한 군사적인 판단과 행동이 얼마나 복잡하고 치밀한 전략적 분석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보여준다. 기만작전의 시행된 내용은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시행될 장소가 노르망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작전과 상관없는 칼레 북부 지역을 기만작전의 대상지역으로 선정하여 독일군의 판단이 칼레 지역으로 향하도록 관심을 끌리 위해 당시 독일군이 두려워했던 패튼 장군에게 지휘를 맡겨 가상의 1군을 조직해 칼레 지역에서 상륙 작전을 시행할 듯이 속이는 양동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위장 작전은 지속적으로 감행함으로써 독일군의 방어 병력 집중을 막을 수 있었다.

전쟁의 결과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벌어진 전투는 계속하여 두 달 동안 이어졌고 이 전투 과정을 수행하면서 서부전선의 독일군 병력을 끝내 무너졌고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연합군의 병력은 정예병사들로 다시 태어났다. 이후 독일군은 프랑스 해방까지 연합군을 상대로 제대로 된 공격을 펼쳐 보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하게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술적 기습 효과를 통해 프랑스 해방과 연합군의 독일 본토까지 진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기회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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