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 정복전쟁
몽골제국은 13세기경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세운 대제국이다. 이후 쿠빌라이 때에 이르러 나라 이름을 '원'이라 바꾸고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거느리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칭기즈칸은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을 점령하며 모든 전쟁 역사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로 원의 침략을 받아 강화를 맺은 이후 정치적인 간섭을 받았다.
1. '유목 민족' 몽골의 영토 확장 과정
몽골족의 명칭은 몽골계 부족 가운데 일부 부족을 지칭하며 더불어 유목민을 뜻하는 의미로 불렸다. 그 밖에 다른 부족들은 각자의 부족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이들은 같은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1162년 몽골의 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몽골족을 통일하겠다."라는 야심을 품었고 그 꿈은 실제로 몽골 부족들의 분열을 하나로 통일시켜 이루었다. 서기 1206년 칭기즈칸은 몽골을 통일시킨 후 대제국을 향한 정복 전쟁의 여정에 나섰다.
가. 탕구르 정벌
몽골의 분열 시기의 상황은 혼란의 시대 그 자체로 불린다. 당시 몽골 사회는 식량, 가축 등의 부족으로 인해 먹고사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복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칭기즈칸은 그 첫 번째 정복의 대상으로 탕구트로 삼았다. 탕구트는 금나라와 연합해 몽골과 대적할 가능성이 높고 경제적으로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하여 경제적으로 재화가 풍부하였다. 결국 칭기즈칸의 공격에 탕구르의 왕은 항복하여 재물과 공주를 칭기즈칸에게 바쳤다.
나. 금나라 정벌
서하, 서요를 정복한 칭기즈칸은 이어서 금나라 정복을 감행하였다. 당시 금나라는 농경과 더불어 수렵에 이르기까지 복합 적인 경제체제를 갖춘 국가로서 중국의 화북 지역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세금을 거두면서 부와 세력을 키우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국가였다. 이러한 금나라를 정복한다면 칭기즈칸의 아시아 지역의 패권 장악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몽골은 엄청난 기동력을 장점으로 갖춘 9만~12만 정예 기병을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금나라는 높은 성벽을 바탕으로 완벽한 방어 태세를 갖춰 몽골에 대항하였다. 금나라의 성벽에 포위망을 만들어 가둔 채 칭기즈칸은 금나라에 제비 1만 마리와 고양이 1천 마리를 잡아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고양이와 제비의 귀소 본능을 이용할 작정으로 그 꼬리에 불을 붙여 돌아간 고양이와 제비가 금나라 들어가 성안을 불바다로 만들어 항복을 이끌었다.
다. 호레즘 왕국 정벌
칭기즈칸은 금나라와의 전쟁 중임에도 끊임없이 주변국에 대한 정보 수집에도 게을리하지 않고 철저히 준비하였다. 호레즘 왕국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포함한 영토를 거느리고 있었다. 호레즘 왕국은 카스피해로부터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며 이미 정치, 경제, 수학, 문화 등이 발달했던 국가였다.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로 다인종을 뜻하는 색목인으로 불리는 민족이기도 하다. 호레즘 왕국은 실크로드 교역에 있어서 주인공적인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수공업과 장사에 능숙했다. 칭기즈칸이 호레즘을 정복하게 된다면 유럽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할 가능성을 높이고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을 장악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줄 지역이었다. 하지만 호레즘 왕국은 몽골과 같은 시기 군사대국으로 급성장한 국가로 강력한 군사력에 대한 소문은 칭기즈칸도 파악하고 있었다. 피해가 커질 호레즘 왕국과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칭기즈칸은 사신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 사신단 파견의 목적은 교역을 통해 호레즘에 대한 정보 수집을 시도하였으나 호레즘 왕국은 점점 세력이 커지는 몽골을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었고 칭기즈칸의 계획과 의도를 간파하여 사절단 400여 명을 모두 처형하였다. 사절단의 처형 소식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의 화친 제의를 거절하자 결국 칭기즈칸은 1218년 호레즘 원정을 결정하였다. 몽골의 전술을 간파한 호레즘 왕국은 수성전으로 대항하였다. 칭기즈칸은 금나라 전투에서 얻은 투석기 공격과 기술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항복하면 살려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처와 자식은 물론 친족을 다 몰살시킬 것이다.라고 공포심을 일으키는 심리전을 펼쳤다. 결국 호레즘 왕국의 많은 도시들이 몽골에 항복하기 시작했고 그렇지 않은 지역은 도시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몰살시켜 흔적도 없이 초토화시켰다.
라. 칼카 강 전투(몽골 제국 최초의 유럽 침공)
호레즘 국왕을 추적하던 몽골은 남러시아 일대에 도착하였다. 단순한 정찰활동을 펼치던 몽골군을 보고 놀란 러시아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경험을 쌓은 몽골이기에 약 3만 명의 병력으로 약 8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격파하여 러시아 군이 전멸한다. 이로 인해 유럽 전역에 흠집 칸의 소문이 퍼져 몽골 군대에 대한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한다.
2. 칭기즈칸의 성공 요소
칭기즈칸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지역까지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유목민만의 독창적인 전술을 바탕으로 한 칭기즈칸의 뛰어난 전략과 패배를 모르는 몽골군의 자신감에서 나오는 팀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 뛰어난 기마 전술
몽골군은 각자 말을 4~5마리를 함께 끌고 다니면서 말이 지치지 않게 번갈아가면서 이동하였다. 또한 말 위에서 말과 한 몸처럼 훈련된 몽골군은 활을 뒤로도 쏠 수 있었는데 이 기술은 적을 유인하는 동시에 공격이 가능했던 전술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등자가 발명되었다.
나. 독보적인 기동력
전쟁 시 부대가 이동하면 다양한 보급품을 지원하는 보급부대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몽골군은 보급부대를 운영하지 않았다. 식량인 육포 또는 고기를 안장 밑에 넣어 보관하면서 이동을 하기 때문에 별도의 보급부대 편성 없이 운용이 가능했다. 이와 같이 몽골군은 군사 한 명이 전투와 보급을 겸한 하나의 군대나 마찬가지였다.
다. 강력한 법
전우를 버리고 혼자 살아온 자들을 사형으로 다스리는 이 법은 군대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조치였다. 적군일지라도 신뢰를 지킨 자에게는 상을 주었고 아군일지라도 배신한 자에게는 엄격하게 벌을 했다. 모든 군사에게 서로 동등한 대우를 함으로써 지휘관도 병사에게 함부로 못하도록 조치하는 등 당시 몽골군은 이미 '열린 군대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3. 몽골제국의 몰락
몽골인들은 유목민으로 한 지역에 정착하지 않고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특성을 가진 민족이다. 유목민에게 중요한 것은 도시의 인프라나 노동력의 관리가 아니라 오직 광활한 목초지를 확보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맞서는 적에게 일절 자비 없이 모두 죽이는 전쟁 방식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악마의 군대'라고 불리며 공포 그 자체였던 몽골족이 지나간 자리는 메뚜기떼가 지나간 것처럼 황폐함만 남을 뿐이었다. 이러한 무자비한 방식으로 단기간에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몽골군에게 약점이 되었다. 점령한 영토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유지할 인재 발굴이나 경제를 성장시킬 노동력에 관심이 없었다. 그로 인하여 뛰어난 과학기술이나 화려한 건축물 등 역사에 남을 작품을 기록하지 못한 채 그들의 광활한 대지의 역사는 100년도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몽골제국의 단기간 역사적 교훈은 로마제국과 비교되고 있다. 비록 짧은 몽골제국의 역사였지만 유라시아 교역 활성화, 문화적 교류 확대, 이슬람권의 확장은 중앙아시아 외에도 여러 국가에 그 영향을 미쳤으며 16세기 이후 오스만과 사파비 제국 모두 몽골제국의 영향 아래 태어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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